Kitabı oku: «전사로의 원정 », sayfa 2
제 3장
맥길 왕의 성품은 완고했다. 이를 보여주듯 왕의 어깨는 두툼하고 떡 벌어져 있었다. 풍성하게 얼굴을 덮은 잿빛 수염은 왕의 긴 머리카락 같은 색을 띠었고 넓은 이마에는 고뇌의 주름이 가득했다. 왕은 왕실 성벽에 서서 점점 완성 되가는 축제준비를 내려다봤고 왕비가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영광스런 맥길 왕의 영토는 시야를 따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나갔고 번성한 도시의 외곽은 고대 돌로 만든 요새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왕궁은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수 많은 거리와 서로 연결돼 있었다. 거리에는 갖가지 석조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각 건물은 전사, 관리인, 말, 실버, 왕의 부대, 친위병, 병사, 무기, 병기 등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 이 외에도 도시의 성벽 내에 살기를 희망하는 그의 수백 명 백성들이 거리 위에 석조건물로 주거지를 이뤘다. 거리 사이마다 4천 평이 넘는 잔디밭이 펼쳐졌고 그 위로 왕실 정원과 석조광장, 넘치는 분수가 가득했다. 왕실은 수세기 동안 번성해왔다. 맥길 왕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 또 그의 아버지 때부터. 그리고 지금은 그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곳이야말로 링 대륙의 서부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맥길 왕의 전사들은 지금껏 어느 왕도 누리지 못했던 최고의 기량과 충성심을 자랑했다. 게다가 맥길 왕의 집권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왕국에 침범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왕위 계승자 맥길 왕 7세는 32년간 왕국을 통치하며 이롭고 어진 왕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의 군림 하에 영토는 번성했고 군대의 규모도 두 배로 성장했다. 도시는 번영했고 백성들의 마음엔 인심이 넘쳐났다. 왕에게 불만을 가진 백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맥길 왕은 선대 왕들과 비교해 가장 자비로웠고 그가 왕권을 쥔 이후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평화로워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맥길 왕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그의 업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다스린 적이 없다는 것을. 왕은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정작 그게 언제이고, 또 누가 침범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가장 큰 위협은 링 대륙 너머에 있었다. 바로 범주 밖의 야만생명체를 다스리고 링 대륙을 에워싸는 협곡 너머의 테두리 땅에서 협곡 밖의 모든 인간을 굴복시킨 미개의 왕국, 와일즈. 지금까지 이어진 맥길 왕족의 집권 동안 야만생명체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이는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캐니언 협곡 안에 위치한 왕국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두께만 2000미터가 넘는 협곡 덕분에 왕국은 다른 세계로부터 자유로웠다. 뿐만 아니라 초대 맥길 왕 1세가 왕권을 손에 쥐기 시작한 이후부터 왕국의 에너지 장이 활성화되어 원형의 캐니언 협곡에 보호막을 생성했고 덕분에 선대 왕들에겐 야만생명체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야만생명체들이 침입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수 차례 에너지 장을 뚫고 드넓은 캐니언 협곡을 넘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협곡이 에워싸는 링 대륙 안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외부의 위협은 문제될게 없었다.
그렇다고 대륙 내부에 아무런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맥길 왕은 밤새 뜬눈으로 근심에 사로잡혔다. 오늘 열리는 첫째 공주의 결혼식 축제 또한 참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링 대륙 안에서 서부 왕국과 대립하고 있는 적국, 동부 왕국과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계획된 결혼식이었다.
양국은 링 대륙의 중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하이랜드 산맥을 기점으로 각각 무려 800킬로미터가 넘는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이랜드 너머에 위치한 동부 왕국이 링 대륙의 나머지 절반을 통치했다. 동부 왕국은 맥길 왕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맥클라우드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고 맥클라우드 왕가는 늘 맥길 왕가와 맺은 허술한 평화조약을 깨고 싶어했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자신들의 영토가 덜 비옥하다는 생각에 끝없이 불만을 품고 만족하지 못했다. 하이랜드 산맥을 두고도 다툼을 벌였다. 산맥 절반이 맥길 왕가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산맥 전체가 맥클라우드 왕가의 통치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산맥의 경계에서는 끊임없는 접전이 벌어졌고 지속적인 침략의 위협이 가해졌다.
맥길 왕은 이 모든걸 심사숙고 했기에 늘 골치가 아팠다. 서부왕국도 링 대륙 안에서는 캐니언 협곡의 보호를 받아 안전이 보장됐다. 더군다나 협곡의 테두리 안에는 비옥한 토지가 가득했고 다른 위험 요소가 없었다. 왜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맥길 왕의 군대가 전례 없이 막강해졌고 이에 맥클라우드 왕은 감히 전쟁을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맥길 왕은 앞으로 무언가가 곧 일어날것이라는걸 짐작했다. 이 평화도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맥길 왕은 직접 나서 자신의 첫째 공주와 맥클라우드 왕의 첫째 왕자와의 혼례를 주선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이들의 결혼식이었다.
맥길 왕은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저 멀리서 밝은 의복을 입은 수 천명의 시중들이 양쪽 국가에서부터 왕궁 곳곳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광경이 보였다. 링 대륙 안의 모든 사람들이 왕의 요새로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왕의 시중들은 몇 달 동안이나 결혼식 준비에 매달려 최대한 모든 것이 번영하고 강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맥클라우드 왕가에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맥길 왕은 도로 위 성벽을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수백 명의 군사들을 살펴봤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군사를 배치시켰고 이에 만족했다. 맥길 왕이 자랑할만한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심이 앞섰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사소한 시비가 번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어느 한쪽에서든 술에 취해 격해진 마음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길 기원했다.
그는 경기장 속 마상장으로 시선을 옮겨 곧 있을 각종 경기와 마상 시합 축제가 한창일 모습을 상상해봤다. 매우 치열한 경기가 될 예정이었다. 맥클라우드 왕은 물론 많은 선수들을 대동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마상 시합과 겨루기 및 경기의 승패에는 엄청난 의미가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약간만 어긋나도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폐하?”
손끝에서 따스함이 느껴져 돌아보니 왕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왕비 크레아가 있었다. 왕비는 맥길 왕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며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고 지금껏 한번도 왕에게 불평을 해본 일이 없었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의논 상대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맥길 왕은 자신의 왕비가 그 누구보다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자신보다도 말이다.
“오늘은 정치적인 날이에요. 허나 우리 딸의 혼인날이기도 하지요. 생애 한번뿐인 날이에요,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세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땐 오히려 걱정이 없었소. 지금은 모든걸 다 가졌고 덕분에 근심만 넘쳐나오. 우리는 안전하지만 내 마음은 불안하오.”
왕비는 크고 자비로운 담갈색 두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두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긴 듯 보였다. 두 눈꺼풀은 언제나 아래로 살짝 늘어져 있었다. 아주 조금 생기가 없는 듯 보였지만 탐스럽게 양쪽 얼굴을 감싸며 곧게 늘어진 왕비의 갈색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약간의 흰머리가 보였고 주름이 조금 있었지만 여전히 한창때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건 바로 우리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어떤 왕도 안전하지 않아요.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첩자들이 성안에 있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왕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왕에게 입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을 만끽하세요. 우리 딸의 혼례 날이잖아요.”
말을 남기고 왕비는 성벽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떠났다.
왕은 왕비가 떠나는 걸 지켜본 뒤 고개를 돌려 왕실을 바라봤다. 왕비가 옳았다. 늘 그녀가 옳았다. 왕은 오늘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오늘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첫째 공주의 혼례 날이었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여름이 도래하기 전 봄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날이었고, 두 개의 태양 모두 하늘 위를 아름답게 장식했으며 축제의 번잡함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만발했다. 곳곳의 나무들은 분홍빛, 보랏빛, 주황빛, 흰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왕은 당장 내려가 백성들과 함께 딸의 혼례를 축하하고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술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성 밖을 나가려면 끝없이 이어지는 정무를 다 처리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공주의 혼례 당일에는 왕에게도 의무가 주어졌다. 왕은 자문단과의 집회에 참석해야 했고, 자식들의 공식 알현에 응해야 했으며 왕의 알현이 정식으로 허락되는 이날만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선 수많은 탄원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야 했다. 운이 좋다면 일몰행사 전에 정무를 마치고 왕실 밖을 나설 수 있을 지도 몰랐다.
*
맥길 왕은 자주색 하의에 금장 허리띠를 두르고 최상의 비단으로 지은 자색과 황금빛의 예복을 걸쳤다. 장막은 순백색이었고 반짝이는 가죽 부츠는 종아리까지 위엄을 더했다. 화려한 금테 한가운데 큼지막한 루비가 빛나는 왕관을 쓰고 뒤로는 시중들을 대동한 채 연회실로 활보했다. 왕은 성큼성큼 걸어 하나의 공간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또 다음 공간으로 이동했고 난간에서부터 궁실로, 다시 고대 양식의 색유리로 하늘 높이까지 장식한 아치형의 복도를 지났다. 마침내 그는 고풍스런 참나무로 만든 문 앞에 이르렀다. 왕이 당도하자 시중들이 앞으로 나서 나무만큼 큰 두께를 자랑하는 문을 열었다. 공식 알현실이었다.
맥길 왕이 입장하자 시중들이 정자세로 그를 맞이했고 왕의 뒤로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앉거라.”
왕은 평소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곤했다. 특히 오늘같이 끝없는 공식 정무를 돌봐야 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왕은 공식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늘 그가 흡족해하는 곳이었다. 천장은 150미터 높이에 이르렀고 한쪽 벽면은 고대 양식의 색유리로 장식됐다. 바닥과 벽면은 30센티가 넘는 두께의 돌로 마감됐다. 백 명 정도의 고관들을 수용해도 끄덕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같이 자문단이 소집된 날엔 단지 왕과 그의 자문단 만이 휑하게 이곳을 채울 뿐이었다. 방을 차지한 건 크기가 어마어마한 반원형 테이블이었고 그 뒤로 자문단이 서 있었다.
입구를 지나 알현실 한가운데를 거쳐 왕좌로 향했다. 왕은 돌계단을 오르고 좌우로 놓인 황금 사자조각을 지나 황금으로 만든 왕좌를 장식한 붉은색 벨벳 쿠션 위에 자리했다. 왕의 선왕과 그 왕의 선왕을 포함해 맥길 왕가의 모든 왕들이 이 자리를 거쳤다. 맥길 왕은 착석하며 선왕들의 중압감을 느꼈다.
왕은 모든 자문단이 참석했는지 살폈다. 명장이자 총 사령 고문관인 브롬, 왕의 부대 사령관 콜크, 가장 연장자인 학자 겸 사학자에 무려 3대 선왕들의 고문관을 지닌 아버톨, 마르고 작은 체구에 머리는 희고 눈은 초점 없이 흔들리는 왕실 내무총관 펄스. 왕은 펄스를 불신했고 내무총관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펄스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모두 왕실 내무총관을 수행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펄스를 이 자리에 앉혔다. 왕의 재무관 오웬, 외무총관 브레데이, 세무총관 어난, 대중 고문관 두웨인, 귀족 대표 켈빈.
두말할 것도 없이 왕은 절대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왕국은 자유주의를 추구했고 선대 왕들 또한 모든 정무에 대표단을 대동시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왕권과 귀족 사이에 놓인 불안한 권력 줄다리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지만 이전에는 귀족과 왕권 사이에 엄청난 권력투쟁이 오갔다. 덕분에 서로가 성장하는 계기가 갖춰졌다.
맥길 왕은 한 명의 불참자를 확인했다. 바로 왕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인물, 아르곤이었다. 아르곤의 참석여부는 언제나 미지수였다. 이에 맥길 왕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엔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왕에게 마법사들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르곤의 불참에 맥길 왕은 더욱 조급해졌다. 결혼식이 진행되기 전에 눈 앞에 산처럼 쌓인 모든 정무를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문단들은 반원형 탁자에 둘러 앉아 왕을 알현했다. 서로간 약 3미터씩 거리를 두었고 모두 정교하게 조각된 팔걸이가 마련된 고풍스런 참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폐하, 말씀을 허락해 주시지요.”
오웬이 청을 올렸다.
“말하거라. 간략하게. 시간이 없구나.”
“공주님께서는 진귀한 진상 품을 가득 받으실 겁니다, 저희 모두 금고가 가득 차도록 많이 받으시길 염원하고요. 수 천명의 백성들이 찬사를 보내고 개인적으로 진상 품을 올릴 것입니다. 상점과 주점이 백성들로 가득하고 이 덕에 저희들의 금고도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축제를 마련하느라 왕실의 재력이 대폭 감소했습니다. 백성들과 귀족들의 세금을 좀 더 걷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특별 세금을 물려 식을 치르느라 입은 손실을 만회하시길 청하옵니다.”
맥길 왕은 재무총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근심을 읽었다. 감소한 재정을 생각하니 왕의 배가 힘없이 꺼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세금부담은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재물이 적은 채로 민심을 살피는 게 바람직하지 않소. 백성들의 행복이 우리의 재물이오. 더 이상의 증세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폐하, 이제 더 이상……”
“이미 결정을 내렸소. 다른 안건은 무엇이오?”
오웬은 침울함에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폐하.”
브롬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오늘 행사를 위해 병력을 총 동원 했습니다. 저희의 군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력이 이곳에 집중돼, 만일 왕국 외부에서 침입이 일어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적들에게 축제의 만찬을 제공하는 한 공격은 없을 것이오.”
브롬은 웃었다.
“하이랜드 산지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소?”
“몇 주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동부왕국은 모든 병력을 혼례 준비에 사용한 것 같습니다. 어쩜 이미 평화로운 관계를 준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맥길 왕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혼례를 주선한 게 효과가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거겠지. 자네 생각도 그러하지?”
맥길 왕은 아버톨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는 순간 목소리가 갈라졌다.
“폐하, 폐하의 선왕, 그리고 선왕의 선왕께서도 맥클라우드 왕가를 신뢰하지 못하셨습니다. 단지 지금 몸을 낮추고 있다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맥길 왕은 그의 의견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부대는 어떻게 되어가나?”
왕은 콜크에게 물었다.
“오늘 신병들 환영 식을 열었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콜크가 대답했다.
“왕자도 포함됐소?”
“왕자님께서도 선발되셨고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계십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인 뒤 브레데이에게 말을 건넸다.
“협곡 너머는 상황이 어떻소?”
“폐하, 순찰병에 따르면 최근 몇 주간 협곡 안으로 진입하려는 횟수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마 야만생물체가 침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징조가 아닌듯싶습니다.”
자문단들 사이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맥길 왕의 복부가 긴장으로 조여 들었다. 에너지 장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러리라는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총력을 다해 침입한다면 어찌되는가?”
“보호막이 활성화되어 있는 한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야만생물체는 지금껏 수세기 동안 한번도 협곡을 뚫은 적이 없습니다. 침입걱정은 놓으셔도 됩니다.”
맥길 왕은 확신할 수 없었다. 외부의 침입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이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펄스의 콧소리가 들렸다.
“제가 한 말씀 거들자면, 왕실은 이미 맥클라우드 왕국에서 보낸 고관들로 꽉 찼습니다. 적국의 고관들이긴 하나 만약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오히려 폐하를 웃음거리로 삼을 겁니다. 오늘 저녁은 그들을 알현하심이 어떠신지요? 그들은 수많은 수행자를 대동하고 찾아왔습니다. 진상 품을 가장한 염탐꾼들을 데리고요.”
“그 염탐꾼이 이 자리엔 없을 거라 그 누가 장담하오?”
펄스를 바라보는 왕의 마음속엔 혹시 그가 염탐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품어져 있었다.
펄스는 왕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순간 맥길 왕은 한숨을 내 뱉고 팔을 저었다.
“오늘 정무가 이게 끝이라면 짐은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겠소.”
“폐하.”
캘빈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정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째 공주님의 혼례 일에 대대로 전해지는 의식을 행하셔야 합니다. 모든 선왕께서는 이날 후계자를 임명하셨습니다. 백성들도 폐하께서 후계자를 임명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궁금해합니다. 그들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더군다나 운명의 검이 여전히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짐이 이렇게 건재한데 후계자를 임명하라고 했소?”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캘빈이 겁에 질려 잔뜩 떨었다.
왕은 고개를 들었다.
“짐도 전통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실은 짐도 오늘 후계자를 선택하려 했소.”
“그렇다면 어느 분을 임명하시려고 하셨습니까?”
펄스가 궁금함을 드러냈다.
심기가 불편해진 왕은 그를 내려다 봤다. 펄스는 뒷말이 많은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왕은 펄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오.”
왕이 일어서자 일제히 모든 신하가 따라 일어섰다. 왕에게 예의를 차린 뒤 서둘러 뒤돌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한 채 맥길 왕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런 날엔 자신도 왕이 아닌 평범한 백성 이길 바랬다.
*
왕좌에서 내려와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왕은 직접 고풍의 참나무 문을 열었다. 다시 강철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고 옆 방에 들어갔다.
맥길 왕은 이곳의 아늑한 공간이 선사하는 평화로움과 고독함을 늘 즐겼다. 아치형의 천장은 높게 뻗어 있었지만 방은 채 스무 걸음도 안될 만큼 작았다. 마감이 전부 돌로 되어있고 한쪽 벽면에 아주 작은 색유리 창문이 나있었다. 노랗고 붉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아무 장식도 없는 방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운명의 검.
운명의 검이 바로 이방에 있었다. 방 한가운데 철로 만든 갈래 위에 수직으로 마치 마음을 현혹하는 요부마냥 누워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래왔듯이 왕은 검으로 다가가 주위를 돌며 유심히 살폈다. 운명의 검. 힘의 근원지이자 맥길 왕가의 세대를 내려오며 왕국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 전설의 검. 그 누구든 이 검을 들어올릴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선택된 자였다. 선택된 자만이 일평생 왕국을 다스리고 링 대륙 안팎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온 아름다운 전설이었다. 오직 맥길 왕가의 왕이 되어야만 검을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맥길 왕도 왕좌에 오르자마자 즉시 이 검을 뽑는 시도를 단행했다. 선대 왕들 모두 검을 뽑는데 실패했지만 자신은 다를 거라 믿었다. 왕은 자신이 선택된 자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선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맥길 왕도 실패했고 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왕업에 큰 타격을 느꼈다.
운명의 검을 주시했다. 그 누구도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신비한 금속으로 이뤄진 긴 칼날을 살폈다. 검의 기원은 더욱 모호했다. 지진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는 설도 전해졌다.
검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실패의 아픔이 느껴졌다. 맥길 왕은 어진 왕이긴 하나 선택된 자는 아니었다. 백성들을 비롯한 그의 적들까지 알고 있었다. 그가 좋은 왕이긴 하나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선택된 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만약 그가 선택된 자라면, 아마 왕실 내에 구금과 음모는 덜 했을 거라 확신했다. 백성들은 그를 더욱 절대적으로 지지했을 테고 적들도 감히 꿈에라도 침략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맥길 왕의 마음 한 켠에선 운명의 검이 전설과 함께 아예 사라져버리길 바랬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바로 그 것이 운명의 검에 얽힌 저주였고 또 힘의 근원이었다. 그 어떤 군대보다 강력한 힘이었다.
그 동안 셀 수 없이 여러 번 검을 살펴봤고 그럴수록 선택 받은 자가 과연 누구일지 궁금했다. 맥길 왕가의 후계 중 과연 누군가가 검을 뽑아들 운명을 얻게 될까? 왕은 눈 앞에 놓인 과업을 생각했다. 후계를 정해야 했지만 자식들 중에 혹 선택된 자가 있다 해도 정령 그게 어느 자식일지 알 수 없었다.
“칼 날의 무게가 상상 그 이상이죠.”
작은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생각에 놀란 왕이 돌아봤다.
문가에 서있는 건 아르곤이었다. 왕은 이미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군지 짐작했고, 그의 불참이 다시 한번 상기되며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론 그의 등장이 반가웠다.
“늦었군.”
“폐하의 시간으론 그렇죠.”
“짐이 이 검을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보긴 했는가? 짐이 왕위 계승을 하던 날 말이오.”
“아니요.”
아르곤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맥길이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짐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걸 자네는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네의 직언이 상처가 되는군. 자네답지 않네.”
아르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왕은 더 이상 아르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짐은 오늘 후계를 발표하오. 이런 날 후계를 정하다니 공허할 뿐이요. 자식을 결혼시키는 즐거운 날, 왕의 기쁨을 앗아가 버리는 것과 같소.”
“어떤 기쁨은 그렇게 완급 되기도 하지요.”
“허나 짐은 아직 정정하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왕은 실눈을 뜨며 생각에 잠겼다. 짐에게 전하는 메시지인가?
그러나 아르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 여섯 중 누굴 골라야 하겠소?”
“왜 제게 여쭈십니까? 이미 정해 두신걸 알고 있습니다.”
왕은 그와 시선을 맞췄다.
“많은걸 알고 있군. 이미 정했소. 그러나 자네 생각이 궁금하군.”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땅 속에 묻힌 왕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죠. 폐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든 운명은 아랑곳 않고 제 길을 찾아 가지요.”
“내가 계속 살 수 있겠소, 아르곤?”
맥길 왕이 솔직하게 물었다. 끔직한 악몽을 꾸고 난 뒤부터 쭉 아르곤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까마귀를 봤소. 짐에게 날아와 왕관을 뺏어갔소. 곧 다른 까마귀가 날 물고 갔지. 발 밑으로 왕국이 보였고 황무지의 땅, 바렌으로 향하는 짐의 몸이 검게 변했소.”
왕은 촉촉해진 두 눈으로 아르곤을 바라봤다.
“단순한 꿈이오? 아니면 무언가가 더 있소?”
“꿈은 늘 꿈 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나요?”
왕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위협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가? 그것만이라도 말해주게.”
아르곤은 가까이 다가가 강렬하게 왕의 눈을 주시했다. 왕의 눈엔 그가 마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르곤은 몸을 숙여 속삭였다.
“언제나 생각한 것 보다 가까이에 있지요.”
제 4장
토르는 거칠게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 뒤편 짚 더미에 숨어 있었다. 어젯밤이 다 되어서야 당도한 길에 줄곧 머무르며 숨어서 타고 갈만한 넉넉한 크기의 마차가 지나가길 침착하게 기다렸다.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천천히 달려오는 커다란 마차가 하나 보였고 토르는 그제서야 힘껏 뛰어 마차에 올랐다. 뛰어오른 마차의 짐칸엔 건초더미가 가득했고 토르는 그 속으로 몸을 묻었다. 운 좋게도 마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토르가 오른 마차가 왕실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 정도 규모와 마차의 문양을 감안하면 왕실 외에 다른 곳으로 갈 확률은 희박했다.
밤새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우며 오늘 대면한 일을 회상했다. 시볼드, 아르곤, 주어진 운명, 진짜 집, 어머니. 마치 우주로부터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또 다른 소명이 주어졌다는 메시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 두 손을 깍지 끼고 누워, 해진 천막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밤 하늘 위를 붉은 별들이 밝게 수놓고 있었다. 기분이 한껏 들떴다. 생애 처음으로 오른 여정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미 몸은 마차에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목적지는 왕실이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빛이 환하게 쏟아졌고, 깨고 나서야 깜빡 잠이 든걸 알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고 졸음을 못이긴 자신을 꾸짖었다. 좀 더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달리는 마차의 덜컹거림이 줄어들었다. 어느덧 평평해진 길 덕분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숙여 길이 얼마나 잘 다듬어졌는지 직접 확인했다. 돌멩이나 도랑 하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조개 껍데기로 이어 만든 길이었다. 길을 보아하니 마차의 목적지가 왕궁인 게 틀림없었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마차 밖으로 살펴본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실은 듯한 온갖 종류의 수레들이 거리를 빼곡히 메웠다. 한 수레에는 모피가 다른 수레에는 양탄자가 또 다른 수레에는 닭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수백 명의 상인들 중 일부는 왕실로 향했고 그 중 일부는 양 손 가득 물건이 가득 쌓인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길다란 막대기에 잔뜩 매단 비단 꾸러미를 사내 넷이서 나란히 이고 옮겼다. 엄청난 인파였고 모두 같은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생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물건들과 다양한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는 동안 자그마한 시골마을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토르가 있는 곳은 다름아닌 어마어마한 인파의 중심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쇠사슬이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크기의 목조교량이 밑으로 내려오며 땅이 진동했다. 잠시 후 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나무 위를 지나가며 딸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냈다. 밑을 내려다 보니 말들이 지나는 건 목조교량이었다. 말로만 듣던 도개교였다.
고개를 밖으로 쭉 빼고 거대한 돌기둥과 쇠못이 박힌 철문을 올려다봤다. 마차는 왕실의 성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지금껏 보아온 모든 문을 통틀어 크기가 가장 컸다. 토르는 철문에 난 못을 살폈다. 철문이 내려오면 토르를 반으로 가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경이로웠다. 성문 입구에서 엄호중인 네 명의 실버 대원이 보이자 심장이 더욱 두근거렸다.
마차는 다시 길고 긴 석조터널을 지났고 터널이 끝나고 나서야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왕궁 내부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왕궁 안은 더욱 활기가 넘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이는 곳마다 무리를 지어 서성거렸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디밭이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주변은 온통 만발한 꽃들로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그 어느 곳보다 드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상점과 노점 및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건 멋지게 갑옷을 차려 입은 실버였다. 꿈꿔왔던 왕궁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토르는 흥분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순간 마차가 멈췄고 그 바람에 토르는 중심을 잃고 뒤로 몸이 젖혀져 덤불 위로 넘어졌다.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나무걸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 화가 잔뜩 난 넝마 차림의 늙은 사내가 나타났다. 마부는 짐칸으로 들어와 앙상한 손으로 토르의 발목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거의 날다시피 바닥에 내팽개쳐진 토르의 꼬꾸라진 등 뒤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내 마차에 타면 쇠고랑을 차게 될 줄 알아! 내가 지금 실버를 호출하지 않는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라고!”
마부는 뒤로 돌아 침을 뱉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 말을 채찍질했다.
창피해진 토르는 천천히 신발을 주워 신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행인 한 두 명이 걸음을 멈추고 킥킥대고 있었다. 그들이 시선을 돌릴 때까지 토르도 똑같이 그들을 비웃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팔을 문질렀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다시 기분이 밝아졌다. 현란한 광경에 눈이 부셨고 마침내 왕궁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게다가 마차 안에서보다 훨씬 자유롭게 왕궁을 구경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시선을 타고 펼쳐지는 왕궁의 모습은 가히 경이로웠다. 중심부에는 으리으리한 석조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은 요새처럼 우뚝 솟은 석조성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성벽 위 곳곳에서는 근위대가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정성스레 손질된 푸른 들판들이 이곳 저곳 드리워져 있었고 나무 숲과 다수의 석조 광장 및 분수들이 그곳을 조화롭게 꾸미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란 곳엔 인파가 넘쳐났다.
온 사방이 상인들, 병사들, 고위 인사들 등 다양한 출신들로 북적거렸고 모두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뭔가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행사가 마련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의자가 놓이고 제단이 세워졌다. 결혼식 준비 같았다.
저 멀리 마상 경기장 안으로 도로와 경계선이 보이자 토르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다른 구장에서는 병사들이 먼 거리의 목표물을 향해 창을 던지고 있었고, 또 다른 구장에서는 궁수들이 짚으로 만든 목표물을 조준하고 있었다. 사방이 경기와 시합으로 가득했다. 음악소리도 들려왔다. 연주자들이 가득했고, 류트, 플루트, 심벌즈의 선율이 울렸다. 와인과 초대형 케이크, 식사가 옮겨졌고 탁자가 세워졌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서 연회준비가 한창이었다. 장대한 축제의 한복판에 이제 막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황홀함을 느낄수록 왕의 부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토르를 보챘다. 이미 늦긴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진가를 알리고 싶었다.
토르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늙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핏물이 베인 옷차림을 보아하니 정육점 주인 같았는데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시간에 쫓기는 모양새였다.
“실례합니다.”
토르가 남자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이지, 얘야?”
“왕의 부대를 찾고 있어요. 혹시 그 훈련장이 어딘지 아세요?”
“내가 지도로 보이냐?”
남자는 토르에게 면박만 주고 급하게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례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갔다. 긴 탁자 위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는 소녀였다. 탁자 위로 소녀 여러 명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적어도 한 명은 길을 알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왕의 부대 훈련소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킥킥거렸다. 그 중 몇 명은 토르보다 서너 살 나이가 많아 보였다.
가장 나이 많은 소녀가 토르를 쳐다봤다.
“장소를 잘못 찾아왔어. 우린 지금 축제 준비 중이야.”
“그렇지만 왕의 부대는 왕궁 안에서 훈련 받는다고 하던데요?”
토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들은 다시 한번 싱긋 웃어댔다. 소녀는 허리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생전 처음 왕궁에 와본 사람 같이 굴고 있잖아. 여기가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니?”
토르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들은 하나 둘씩 웃어대다 결국 다 함께 박장대소했다. 놀림 당한 마음에 기분이 언짢았다.
눈 앞엔 열두 갈래의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굽이굽이 난 길은 모두 왕궁을 가로질렀다. 돌로 된 담벼락 사이마다 적어도 12개 이상의 출입문이 들어서 있었다. 왕궁의 크기와 규모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몇 날 며칠을 찾아도 훈련장을 못 찾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병사들이라면 누구나 훈련장 위치를 알고 있었다. 병사에게 말을 거는 건 긴장됐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뒤돌아 성벽으로 달렸다. 출입구 가장 가까이 근무중인 근위병을 찾아갔다. 행여 메치기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마음을 애써 숨겼다. 눈 앞의 근위병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의 부대를 찾고 있습니다.”
토르는 최대한 자신감 있어 보이도록 신경 써서 말을 건넸다.
잠깐의 정적 뒤에 근위병이 냉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겠어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토르는 애원하듯 대답했고 더 이상 근위병이 캐묻지 않길 바랬다.
근위병은 토르를 무시하고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대답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참 뒤, 근위병이 입을 열었다.
“동문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쭉 가. 왼쪽에 있는 세 번째 문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빠져.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빠져. 두 번째 석조 원형 구조물을 지나면 그곳으로 가는 문이 있어. 그러나 가봐야 시간 낭비야. 방문객은 받지 않아.”
대답은 충분했다. 일초도 낭비하기 싫어 재빨리 뒤돌아 들은 대로 뛰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길을 반복해 읊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너무 늦기 않게 훈련장에 당도하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
깨끗한 조개 도로 위로 왕궁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사력을 다해 달렸다. 길을 잃고 헤맬까 두려워 가능한 한 일러준 대로 따라갔다. 저 멀리 안뜰 끝에 여러 개의 문이 보였고 그 중 왼쪽 세 번째 문을 통과한 뒤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한 길 한 길 건너갔다. 토르가 뛰는 방향은 사람들과 정 반대였다. 수천 명이 도시로 몰려든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거세졌다. 류트 연주자, 곡예 꾼, 광대 등 온갖 재능을 갖춘 예능인들을 비롯해 한껏 차려 입고 나온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토르가 빠진 채로 진행되는 부대원 심사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훈련장만 생각하며 훈련장처럼 생긴 건물만을 찾아 거리를 뒤졌다. 원형의 석조건물 끝에 또 다른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서 훈련장으로 보이는 완벽한 원형의 석조 콜로세움이 조그맣게 보였다. 큼지막한 정문 한가운데는 보초병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있었다. 정문 밖으로 울려 퍼진 환호성이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고 덕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의 부대 훈련장이 틀림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리자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정문 앞으로 다가간 순간 보초병 두 명이 나와 창살을 겨누며 길을 막았다. 그리고 또 다른 보초병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손바닥으로 토르를 막아 섰다.
“멈춰라.”
토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멈췄다. 얼굴엔 흥분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해…… 못 하시……겠지만”
토르는 숨을 고르느라 더듬거렸다.
“저는 꼭 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늦었습니다.”
“어디에 늦었다는 건가?”
“부대원 심사요.”
짤막한 키에 얼굴엔 곰보자국이 가득한 뚱보 보초병이 뒤로 돌아 냉소적인 눈빛의 나머지 보초병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깔보는 눈빛으로 토르를 살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왕실 수송실에서 심사가 시작됐다. 선발되지 않은 자는 입장할 수 없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전 꼭.”
보초병이 다가서서 토르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이해를 못하는군, 건방진 꼬맹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따위가 들어가겠다는 거냐? 당장 구금되기 싫으면 돌아가.”
보초병에 밀쳐진 토르는 뒷걸음질 쳤다.
밀쳐진 가슴팍이 따끔했다. 그러나 이보다 출입을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라렸다. 화가 치밀었다. 고작 보초병에게 밀려 심사도 제대로 못 받고 돌아가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뚱보 보초병이 동료들에게 돌아가자 토르는 천천히 그곳을 빠져 나와 시계방향으로 콜로세움을 돌았다. 품은 계획이 있었다. 보초병의 시야를 피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힘껏 뛰어올라 벽을 타고 건물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토르는 보초병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전속력을 다해 벽을 뛰어 넘었다. 건물의 절반쯤 진입했을 때 경기장으로 안내하는 또 다른 출입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의 석조 출입문들은 모두 아치형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쇠로 된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었지만 단 한곳만은 예외였다. 또 다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토르는 선반 위로 몸을 일으켜 내다봤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어마어마한 원형 경기장 안을 수십 명의 선발대원이 메우고 있었다. 토르의 형들도 보였다. 줄을 맞춰 정렬한 이들 앞엔 실버대원 열 두 명이 서 있었다. 대원들은 이들 사이로 걸어가 선발된 인원을 확인했다.
선발대원 무리 하나는 옆으로 빠져 있었다. 그들은 실버 대원들의 주시 하에 창을 던져 멀리 떨어진 목표물을 맞추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목표물을 놓쳤다.
그 모습에 울화가 터졌다. 토르라면 충분히 목표물을 맞추고도 남았다. 토르는 저들과 비교해 모자랄 게 없었다. 단지 조금 어리고 몸집이 그들보다 아주 조금 작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되지 못한 건 불공평했다.
난데없이 등뒤로 손길을 느껴졌다. 순간 그대로 낚인 토르는 뒤로 날아가 바닥에 매몰차게 내동댕이 쳐져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올려다보니 아까 그 보초병이 비꼬는 얼굴로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꼬맹이?”
토르가 채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보초병은 몸을 쭉 빼 토르에게 거센 발길질을 가했다. 보초병의 발에 맞은 순간 토르는 갈비뼈에 예리한 타격을 느꼈다.
다시 한번 보초병이 발을 들어올렸을 때 토르는 공중에 뜬 보초병의 발을 잡았다. 덕분에 보초병은 중심을 잃고 보기 좋게 넘어졌다.
그사이 재빨리 토르가 몸을 일으켰고, 넘어진 보초병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토르는 자신이 한 짓에 너무 놀란 나머지 보초병의 눈치를 살폈다. 보초병은 눈을 번뜩이며 토르를 마주보고 있었다.
“네가 널 구금만 시키고 끝낼 줄 아나 본데.”
보초병이 씩씩거렸다.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게. 감히 폐하의 병사에게 손을 대다니. 왕의 부대에 가입하려는 꿈은 이제 접어라. 지하 감옥에서 썩을 각오나 해둬. 운이 좋아야 다시 세상 구경 하겠지!”
보초병은 족쇄가 달린 쇠사슬을 꺼내 앙갚음을 하겠다는 표정으로 토르에게 다가갔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구금이라니, 말도 안됐다. 그렇다고 구금을 면하자고 폐하의 병사를 다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 당장.
새총이 생각났다. 반사적으로 새총에 돌을 끼워 조준했고 돌멩이가 날아갔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족쇄에 명중한 뒤 깜짝 놀란 보초병의 손가락을 맞췄다. 족쇄가 땅으로 떨어지자마자 보초병은 손을 뒤로 빼 앞뒤로 흔들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보초병은 살기를 가득 띤 얼굴로 검을 뺐다. 독특한 금속 고리가 가득 박힌 검이었다.
“방금 전 돌멩이는 네 생애 마지막 실수가 될 거다.”
보초병은 무섭게 위협하며 토르에게 돌진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돌멩이 하나를 다시 새총에 끼우고 던졌다. 신중하게 조준했다. 보초병을 자제시켜야 했지만 죽이고 싶진 않았기에 심장, 코, 눈, 머리가 아닌 그를 멈출 수 있게 해줄 단 한 곳을 겨냥했다.
사타구니.
힘의 세기를 조절해 보초병이 쓰러질 정도의 힘만 가했다.
명중이었다.
보초병은 검을 떨어드리고 무릎을 꿇었다.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져 몸을 동그랗게 말고 데굴데굴 굴렀다.
“넌 참수 형이야.”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경비! 경비!”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여러 명의 보초병이 보였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 난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난간으로 몸을 날려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주목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토르를 막는 모든 사람들과 겨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