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tabı oku: «용의 숙명 », sayfa 2
제6장
개리스 왕은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놀랐으며 앞으로의 결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속수무책이었다. 지금껏 7대의 선대 맥길 왕들이 들어올리지 못했던 운명의 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들어올리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스스로를 선대 왕들보다 우월하리라 생각했던 것인가? 왜 스스로는 다를 것이라 여겼던 것인가?
그는 짐작했어야 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왜 스스로를 몰아부친 것인가?
이제 그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인이 알게 됐다. 이제 그의 통치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이로 인해 자신이 아버지 암살의 배후라는 확신을 더욱 심어준 셈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개리스 왕은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선이 달라진 걸 느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꼭두각시 왕으로 여긴 듯 했으며. 모두의 시선이 이미 다음 왕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 했다.
더욱 비참한 건 바로,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링 대륙을 통치하며,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는 선택 받은 자일 거라 믿었다. 이러한 그의 자만은 이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이제 그는 모든 것에 확신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검을 들어올리기 전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검을 들지 못한 건 아버지의 복수인 것일까?
“브라보,” 어디선가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말을 건넸다.
혼자였다 생각했던 개리스 왕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한번에 알아챘다. 지난 수 년간 익숙하게 들었던 그가 경멸하는 인물, 부인의 목소리였다.
헬레나.
그녀는 집무실 한쪽 구석에서 아편이 담긴 파이프를 피우며 개리스 왕을 주시했다. 아편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인 뒤 숨을 참고 다시 연기를 천천히 뱉어냈다. 헬레나 왕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녀가 아편 파이프를 지나치게 많아 피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오?” 개리스 왕이 물었다.
“여기 우리 집무실이잖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여기선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난 당신 부인이자 왕비이니. 잊지 마요. 나도 당신처럼 이 왕국을 지배하는 인물이니까. 그리고 오늘 당신의 커다란 패배로 말미암아, 지배 라는 말은 아무나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개리스 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헬레나 왕비는 언제나 개리스 왕이 가장 힘들고 상황이 부적절한 시기에 그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자신의 부인을 혐오했다. 둘의 결혼에 동의했던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개리스 왕이 몸을 돌려 침을 뱉고는 분노하듯 그녀에게 다가섰다.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본데, 아가씨, 네가 내 부인이든 아니든 왕국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난 널 구금시킬 수 있어.”
헬레나 왕비는 조롱 섞인 콧방귀를 끼며 개리스 왕을 비웃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헬레나 왕비가 반문했다. “네 백성들이 너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까? 아마도, 매우 그렇겠지. 그건 개리스란 인간이 계획한 일에 어긋나지. 그 누구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중시하는 남자에게는.”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언제나 자신을 꿰뚫어본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이 심기가 불편했다. 개리스 왕은 그녀의 협박에 수긍했고 그녀와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개리스 왕은 그곳에 서서 조용히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오?” 개리스 왕은 분노를 애써 누르며 천천히 말을 걸었다. “당신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날 찾지 않소.”
그녀는 짧게 조롱 섞인 웃음을 날렸다.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직접 가져요.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대신 이야기 좀 하러 왔죠. 당신의 왕국 전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 라니?” 개리스 왕은 그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반문했다.
“이제 당신의 백성들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잖아요. 당신이 패배자라는 사실이요. 당신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요. 축하해요. 이제 이건 공식 사실이 됐네요.”
개리스 왕은 인상을 가득 썼다.
“내 아버지도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진 못했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건 아니었잖소.”
“그렇지만 왕권에는 영향을 받았죠,” 헬레나 왕비가 조롱하며 맞받아쳤다. “매 순간 순간마다요.”
“그렇게 내 무능력이 싫으면,” 개리스 왕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곳을 왜 떠나지 않소? 날 떠나시오! 우습지도 않은 이 결혼을 끝내시오. 난 이제 왕이오. 그 누구도 더 이상 필요 없소.”
“그 말을 꺼내줘서 기쁘네요,” 헬레나 왕비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제가 이곳에 온 이유에요. 당신이 공식적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을 끝내줬으면 해요. 이혼해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진짜 남자요. 사실, 당신의 기사 중 한 명이에요. 그는 전사에요. 우린 서로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요. 더 이상 이 관계를 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이혼해줘요. 제 사랑을 공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요.”
개리스 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멍하니 왕비를 바라봤다. 심장에 단검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가? 왜 그 많은 순간 중 지금인가? 너무 버거웠다. 쓰러져 있는 자신에게 세상이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리스 왕이 자신이 왕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비가 실제로 이혼을 거론했을 때 무언가를 느꼈다. 분노가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의 이혼을 원치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약 개리스 왕이 먼저 이혼을 거론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가 거론했기에,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왕비가 손쉽게 원하는 걸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혼이 왕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이혼한 왕이라는 사실에 수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더불어 개리스 왕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왕비가 사랑한다는 전사에게 질투가 났다. 또한 자신의 면전에서 남편으로서 부족한 남성성을 지적하는 왕비에게 분노했다. 그는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혼은 못해주오,”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나에게 묶어있소. 영원히 내 부인으로 살아야 하오. 당신에게 절대 자유란 없을 것이오. 또한 내가 만약에라도 그 전사를 보게 된다면, 그를 고문하고 처형할 것이오.”
헬레나 왕비는 개리스 왕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난 당신 부인이 아니야! 당신 또한 내 남편이 아니지. 당신은 남자가 아니야. 이 결혼은 불성실한 결합일 뿐이야. 처음부터 그래왔어. 권력을 위해 계획된 협정일 뿐이야. 이 모든 것이 역겨워. 늘 그랬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난 진정한 결혼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했지.”
왕비가 숨을 골랐지만 그녀의 분노는 더해졌다.
“이혼을 해 줘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왕국 전체에 고할 테니까. 당신이 결정해.”
이 말을 남기고 헬레나 왕비는 뒤돌아 걸어나갔다. 열려있는 방문을 나서며 다시 문을 닫는 수고도 잊었다.
개리스 왕은 석조 건물에 홀로 남아 왕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온 몸에 찬 기운이 들었음에도 차마 몸을 떨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것이 있을까?
개리스 왕은 열려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내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펄스가 나타나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와의 대화를 충분히 심사숙고 할 시간을 놓쳤다. 그녀의 협박을 제대로 가늠해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펄스는 특유의 방정맞은 걸음걸이 대신 죄지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섰다.
“개리스?” 펄스는 확신 없는 어조로 말을 건넸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주시하는 펄스를 보자 개리스 왕은 그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속상해야 한다고 개리스 왕은 생각했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을 들라고 설득한 것도 펄스였고 자신을 능력 이상의 사람이라 헛바람을 넣은 것도 펄스였다. 펄스의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을까?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을 들 시도조차 안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개리스 왕은 분개하며 펄스에게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마땅한 대상을 찾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펄스였다. 이 모든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이 바보 같은 펄스였다. 이제 개리스 왕은 또다시 선택 받지 못한 맥길 왕가의 왕일 뿐이었다.
“널 증오해,” 개리스 왕이 분개했다. “네 약속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거라는 네 확신은?”
펄스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펄스가 대답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넌 많은 걸 틀리지,”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펄스는 모든 걸 망쳐놨다. 실제로 펄스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럼 개리스 왕은 이 엉망인 상황 속에 놓여있을 필요도 없었다. 왕권의 무게 또한 감당할 필요가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잘못 될 리가 없었다. 개리스 왕은 단순했던 과거가 그리웠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자신이 왕이 아닌 시절이 사무쳤다. 그 모든걸 다 되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던 그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을 원망할 펄스만이 눈 앞에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개리스 왕은 펄스를 압박했다.
펄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는 소문을…시중들이…떠드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폐하의 누이와 형제 분이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제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두 사람은 하인들이 일하는 곳에서 목격됐습니다. 살인 무기를 찾으려고 오물 통을 수색했답니다. 제가 폐하의 아버지를 암살할 때 사용한 단검이요.”
펄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개리스 왕의 몸이 굳어갔다. 공포와 두려움이 온 몸을 마비시켰다. 이 보다 더 엉망인 하루가 있을 수 있을까?
개리스 왕은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뭘 찾았지?” 개리스 왕은 바짝 마른 입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펄스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들이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리스 왕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만큼 펄스에게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펄스의 갈팡질팡하는 태도만 아니었다면, 무기를 제대로 처리하기만 했더라면, 개리스 왕이 이러한 상황에 처할 리가 만무했다. 펄스 덕에 개리스 왕은 속수무책이었다.
“난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거야,” 개리스 왕이 펄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호한 표정으로 펄스를 주시했다.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알아 듣겠나? 이 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왕실 밖으로 널 좌천 보내겠다. 만약 네가 이 성안에 발을 다시 디딘다면, 널 체포할 것이다.”
“당장 떠나!” 개리스 왕이 고함을 질렀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펄스는 뒤돌아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개리스 왕은 다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운명의 검을 생각했다. 스스로 큰 재앙을 초래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절벽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추락을 직면하게 될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집무실 석조 바닥 위 깊게 울리는 침묵 속에 홀로 서서 온 몸을 떨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했다. 이 보다 더 사무치게 외로울 순 없었다.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것이 왕의 자리인가?
*
개리스 왕은 서둘러 원형의 석조 계단을 올랐다. 성의 가장 높은 난간을 향해 황급히 한 층 한층 올라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왕국의 전망과 백성들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공간이 필요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악몽 같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는 여전히 이 왕국의 왕이었다.
개리스 왕은 뒤를 따르는 시중들을 물리고 홀로 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다 중간에 멈춰 몸을 구부리고는 숨을 골랐다. 두 뺨에 그의 눈물이 타고 내렸다. 계속해서 매 순간마다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신을 경멸해요!” 그는 허공에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그는 분명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비웃음이었다.
개리스 왕은 그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쉬지 않고 원형 계단을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눈 앞의 문을 박차고 나가자 신성한 여름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한참 동안이나 숨을 참으며 따뜻한 바람과 햇살을 만끽했다. 개리스 왕은 어깨에 걸친,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걸쳤던 망토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날이 무더웠기에 더 이상 망토를 걸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석조 벽으로 이뤄진 난간의 가장자리로 서둘러 자리를 옮겨 거친 숨을 쉬며 왕국을 내려다봤다. 끝없는 인파가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오늘 행사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인파였다. 저 수 많은 인파가 모두 자신의 통치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단 말인가?
“왕좌란 재미있는 것이지요,”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개리스 왕이 뒤를 돌아보자 눈 앞에 아르곤이 보였다. 흰색 망토와 후드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한걸음 뒤에 떨어져있었다. 아르곤은 자신을 바라보는 개리스 왕을 바라봤다. 입가엔 미소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소를 찾을 수 없었다. 아르곤의 두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고 개리스 왕을 꿰뚫어 보며 그를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을 너무 많은 것을 목격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게 끝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개리스 왕이 간절하게 물었다. “자네는 내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님을 미리 말해줄 수 있지 않았나. 날 이런 수모로부터 막아줄 수 있었네.”
“왜 그래야 하는지요?” 아르곤이 반문했다.
개리스 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왕의 진정한 조언자가 아니군,” 개리스 왕이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충고를 했을 망정, 내겐 그렇지 않구나.”
“아마도 폐하의 선왕께서는 진정한 조언을 누릴 자격을 갖췄던 거겠죠,” 아르곤이 대답했다.
개리스 왕의 분노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아르곤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를 원망했다.
“자네가 내 주변을 맴도는 걸 원치 않는다,” 개리스 왕이 말했다. “왜 선왕께서 자네를 곁에 두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왕국에서 떠나길 바란다.”
아르곤은 공허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왕께서 절 곁에 두신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여,” 아르곤이 설명했다. “선왕의 선왕도 아니지요. 저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을 곁에 두었다고 정정해야겠지요.”
순간 아르곤은 개리스 왕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그를 주시했다.
“폐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르곤이 물었다. “폐하는 이곳에 있을 운명인가요?”
아르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개리스 왕의 신경을 강타했고, 개리스 왕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르곤이 던진 질문이야말로 개리스 왕 스스로가 궁금해했던 것이었다. 개리스 왕은 지금 아르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로써 대위를 잇는 자는 피로써 지배한다,” 아르곤은 이 말을 남긴 채 뒤돌아 걸어갔다.
“기다리시오!” 개리스 왕이 소리쳤다. 아르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랬다. 그의 답이 필요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이 자신에게 오랜 시간 통치하지 못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 여겼다. 아르곤이 정말 그런 의미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남긴 건지 확인해야 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을 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아르곤은 눈 앞에서 사라졌다.
개리스 왕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르곤!” 개리스 왕지 다시 외쳤다.
개리스 왕은 다시 몸을 돌려 하늘 위를 바라봤다.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는 사력을 다해 외쳤다:
“아르곤!”
제 7장
에레크 명장은 공작과 브랜디트와 나란히 북적 이는 사바리아의 길을 걸었고 그들 뒤로는 수십 명의 수행단이 따랐다. 그들이 시녀의 집을 향해 거리로 나오자 그들을 보기 위한 인파가 더욱 거세졌다. 에레크 명장은 지체 없이 바로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고집했고 공작은 직접 에레크 명장을 시녀에게 안내하겠다고 했다. 공작이 나서는 길을 따라 군중들이 뒤를 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뒤를 잇는 수 많은 군중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구경꾼들을 대동하여 그녀의 집에 당도하게 되리란 생각에 꽤나 민망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레크 명장은 몇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그 여인은 누구인가, 기품이 흘러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백작의 성에서 시녀 일을 하는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내 눈앞에서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던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수 많은 귀족 여인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여인만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가?
한 평생을 왕족과 함께하며 왕의 후손으로 대접받은 덕에 에레크 명장은 한눈에 다른 이의 기품을 알아봤다. 그렇기에 에레크 명장은 그 여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지금 하는 일과는 달리 좀 더 지체 높은 신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 곳에서 무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는 다시 한번 두 눈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저 멋대로 상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 맞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시중이 말하길 그녀는 도시의 외각에 머물고 있다고 하네,” 에레크 명장과 함께 걷던 공작이 설명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시에 길가에 위치한 모든 집집마다 창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모두가 평민이 사는 동네에 공작과 그의 수행원들이 등장한 까닭을 궁금해 했다.
“듣자 하니, 여관 주인의 하녀로 있다더군. 그녀의 출신이 어디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녀가 어느 날 이 도시로 왔고, 계약을 맺어 여관 주인의 하녀가 됐다는 것이네. 그녀의 과거는, 보아하니 불분명하네.”
일행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거칠었고 걸어 갈수록 보잘것없는 작은 집들이 더욱 밀집되어 붙어 있었다.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이번 특별한 행사를 맞이해 그녀를 내 궁전의 시녀로 들인 걸세. 그녀는 조용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네.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네. 에레크 명장,”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고 한 손으로 명장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로 이 일에 확신이 있는가? 이 여인이, 누구이던 간에, 그녀는 그저 평민일 뿐일세. 자네는 왕국의 어느 여인이든 아내로 삼을 수 있지 않은가.”
에레크 명장은 이전과 같은 강렬한 표정으로 공작을 마주했다.
“저는 이 여인을 꼭 다시 봐야겠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상관 없습니다.”
공작은 어쩔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의 고집에 고개를 저었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이리저리 놓여있는 길을 걷고 좁은 모퉁이를 돌고 돌았다. 길을 따라 걸어갈수록 사바리아의 거리는 더욱 지저분해졌고 술 취한 취객들이 곳곳에 가득했으며 이곳 저곳으로 오물과 함께 닭들과 들개들이 떠돌고 있었다. 공작 일행은 여관을 지나 또 다른 여관을 지나쳤다. 거리 위로는 길가는 행인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이들 앞으로 몇몇 술주정뱅이들이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고 어둠이 깊어져 횃불만이 길을 밝혀 주었다.
“공작님 행차이시니라!” 앞서 길을 안내하는 하인이 서둘러 술주정뱅이들을 밀치며 외쳤다. 거리 곳곳마다 불결해 보이는 길들이 이리저리 나뉘어져 있었고 에레크 명장과 함께 하는 공작의 일행을 본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들의 행렬을 지켜봤다.
마침내 공작 일행은 작고 초라한 여관 앞에 도착했다. 외부는 벽토가 발려 있었고 경사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건물이었다. 일 층 주점은 대략 50여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규모였고 이층에는 숙박객을 위한 객실 몇 개가 전부였다. 입구는 기울어져있었고 창문 하나는 유리창이 나가있었다. 입구에 달아놓은 램프가 삐뚤어져 횃불이 깜박거렸다. 공작 일행이 입구 근처로 다가서자 창문 밖으로 술 취한 취객들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토록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 어찌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안에서 울려 퍼지는 고성과 야유 소리에 개탄한 에레크 명장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겪을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이건 옳지 않다, 라고 명장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이곳에서 반드시 빼내오리라 다짐했다.
“신붓감을 찾기에 가장 최악인 장소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브랜디트 또한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이게 마지막이네, 친구,” 브랜디트가 입을 열었다. “궁전에는 아직 자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인들로 가득하네.”
그러나 에레크 명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렀다.
“문을 여시오,” 에레크 명장이 명령했다.
공작의 시중 하나가 앞으로 달려와 여관 문을 활짝 열었고 그와 동시에 오래된 술 냄새가 퍼져 나와 시중은 얼굴을 찌푸렸다.
내부에는 술 취한 취객들이 바에 엎드려 있었고, 목재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서로 조롱을 퍼붓고 이리 저리 밀치고 있었다. 인생을 막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에레크 명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산처럼 튀어나온 배와 얼굴에는 깍지 않은 무성한 수염, 세탁하지 않은 옷을 걸친 주정뱅이들이었다. 그 누구도 전사의 기량을 가진 자는 없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찾기 위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같은 여인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곳이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저는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옆에 서 있던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배는 산처럼 솟아 있었고 얼굴은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사내는 조롱하듯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럼, 잘못 찾아왔소! 여긴 사창가가 아니야. 사창가는 저기 길 건너에 있지. 거기 여인들이 꽤나 실하고 포동포동 하다더군!”
사내는 에레크 명장의 면전에 대고 거슬릴 만큼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사내의 친구들 또한 사내와 함께 웃어댔다.
“제가 찾는 건 사창가가 아닙니다,” 언짢아진 에레크 명장이 대답했다. “한 여인을 찾고 있어요, 여기서 일하는.”
“여관 주인의 하녀를 찾는 거군,” 거구의 술 취한 한 사내가 저 멀리서 대답했다. “아마 저 뒤에서 바닥을 닦고 있을 거요. 안됐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무릎 위에!”
술집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사내의 농담에 정신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레크 명장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그녀가 이러한 형편없는 사내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경멸스러웠다.
“그쪽은 뉘신지요?” 멀리서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다른 사내들보다 눈에 띄게 체구가 건장하고 짙은 수염에 짙은 눈빛을 지닌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얼굴 가득히 인상을 쓰고 단단한 턱이 눈이 뛰었다. 그는 지저분해 보이는 여러 명의 사내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는 근육이 가득한 거구로 에레크 명장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분명한 시비였다.
“내 하녀를 뺏어가려는 거요?” 사내가 말했다. “그럼 한번 겨뤄보시지!”
사내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에레크 명장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랜 훈련을 수행한 왕국 최고의 전사인 에레크 명장은 사내가 상상조차 못한 반응을 보여줬다. 사내가 에레크 명장에게 손을 대려는 순간, 명장은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쥐고 번개처럼 사내를 뒤집어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저 멀리 날려버렸다.
거구의 사내는 마치 포탄처럼 날아가 주변에 있던 무리들과 섞여 볼링 핀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며 술집은 적막에 휩싸였다.
“싸워라! 싸워라!” 취객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정신을 못 차리던 여관 주인은 고함을 외치며 에레크 명장에게 달려들었다.
에레크 명장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다. 명장은 앞으로 나서 한쪽 팔을 들어 팔꿈치로 여관 주인의 얼굴을 가격해 코뼈를 부러뜨렸다.
여관 주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레크 명장은 여관 주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거구의 체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명장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치켜 든 여관 주인을 허공으로 던졌고 여관 주인은 그렇게 허공을 갈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술집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그대로 굳었다. 적막이 흘렀고 모두가 에레크 명장이 예사 인물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순간 술집의 바텐더가 술병을 머리 위로 들고 민첩하게 에레크 명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급습을 간파한 에레크 명장은 이미 검을 뽑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명장이 검을 채 뽑기도 전에 브랜디트가 앞으로 나서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달려오는 바텐더의 목을 겨눴다.
바텐더는 자신을 겨눈 단검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조금만 더 움직였더라면 칼날이 살을 파고들었을 게 분명했다. 바텐더는 그렇게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땀을 흘리며 한 손에는 병을 쥐고 멈춰있었다. 그렇게 술집 안은 침묵이 흘렀고 너무나 고요해 저 멀리서 못이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병을 내려 노시오,” 브랜디트가 명령했다.
바텐더는 브랜디트의 말에 따라 술병을 바닥에 던졌다.
에레크 명장은 칼날이 칼집에 부딪히는 금속 소리와 함께 검을 빼 들어 여관주인에게 다가갔다. 여관 주인은 여전히 바닥 위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명장은 그의 목에 칼끝을 겨눴다.
“두 번 이야기하지 않겠다,” 에레크 명장이 입을 열었다. “여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거라. 당장. 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길 바란다. 단 둘이서.”
“공작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술집의 모든 사람들이 공작이 있는 쪽을 바라봤고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술집으로 들어서는 공작을 한눈에 알아봤다. 모두가 서둘러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이곳을 나가지 않는다면,” 공작이 말을 이었다. “여기 남은 모든 자를 구금할 것이다.”
순식간에 술집은 광란에 빠졌다. 술을 마시던 사내들은 일제히 서둘러 입구 앞에 서있는 공작을 지나쳐 술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시던 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네도 나가시게,” 브랜디트가 겨누던 칼끝을 내리고 바텐더의 머리를 붙잡아 술집 밖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소란스러웠던 실내가 이제는 고요해졌다. 술집에는 여관주인을 비롯해 에레크 명장, 브랜디트, 공작과 열 두 명의 공작 수행원이 남아있었다. 수행원들은 철커덩 소리를 내며 술집 문을 내렸다.
에레크 명장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바닥에서 코피를 닦고 있는 여관 주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여관 주인을 그의 뒤에 있는 벤치 위에 앉혔다.
“당신이 내 장사를 망쳤소,” 여관 주인이 불평했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공작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여관 주인을 마주봤다.
“자네가 이 젊은이에게 손을 대려 한 것만으로도 난 자네를 처형할 수 있네,” 공작이 여관 주인을 책망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는가? 에메크 명장일세, 왕의 최정예 기사이자 최고의 실버 전사이지. 에레크 명장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자네를 없앨 수 있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들어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제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가 몰라봤습니다. 뉘신지 말씀을 안 해주셨잖아요.”
“그녀는 어디 있는가?” 에레크 명장은 급한 마음에 여관 주인을 다그쳤다.
“저 뒤에서 주방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제 하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뭘 훔치기라도 했나요? 쟤는 그저 제가 고용한 하녀일 뿐입니다.”
에레크 명장은 단검을 꺼내 여관 주인의 목을 겨눴다.
“다신 한번 그녀를 ‘하녀’라고 불러보게,” 에레크 명장이 경고했다. “그럼 네 목을 잘라버리겠네. 알겠는가?” 명장이 여관 주인에게 칼끝을 겨누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여관 주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서둘러 이곳으로 데려오거라,” 에레크 명장이 여관 주인의 발을 차며 뒷문 쪽을 향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여관 주인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주방 쪽에서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고 소리 없는 다그침이 들려왔다. 얼마 후, 주방 문이 열렸고 보잘것없는 넝마로 만든 원피스에 주방 기름을 잔뜩 묻힌 하녀 여럿이 걸어 나왔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자신이 말한 여인이 누구인지 여관 주인이 알긴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곧, 세 명의 하녀 뒤로 그녀가 뒤따라 걸어 나왔다. 순간 에레크 명장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찾던 그녀였다.
기름때가 가득 묻은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고개를 들기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묶어 천으로 감싸여 있었고 양 볼은 그을음이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피부 결은 아이처럼 티없이 맑았다. 뺨이 높고 턱이 가늘며 작은 코 위로는 주근깨가 보였고 입술은 도톰했다. 넓고 기품 있는 이마 위로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보닛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잠시 에레크 명장을 힐끗 바라봤고 그 덕분에 보석같이 아름다운 엷은 황록색 눈동자가 불빛에 비춰 크리스탈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이 모습을 바라본 에레크 명장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에레크 명장을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처음 봤던 그 때보다 더욱 그녀에게 매료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뒤로 여관 주인이 인상을 쓰며 여전히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와 에레크 명장 앞으로 먼저 나와있던 노년의 여성들에게 둘러 쌓였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릎을 구부려 인사를 건넸다. 공작이 대동한 수행원들과 함께 에레크 명장은 그녀 앞에 다가가 그녀를 마주봤다.
“주군,” 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에레크 명장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제가 주군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제가 공작님의 궁궐에 들어가 주군께 실례를 범한걸 용서해 주십시오.”
에레크 명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어투와 어조, 음색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끊임 없이 속삭여주길 바랬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부드럽고 자상하게 그녀의 턱을 치켜 세웠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요동치는 듯 했다. 푸른 빛 바닷물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제게 무례를 범한 건 없습니다. 아가씨가 결코 제게 무례를 범할 일을 없을 듯 합니다. 저는 누군가를 질책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사랑에 끌려 왔습니다. 아가씨를 본 순간부터 아가씨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옮겼고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그녀는 양 손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분명 이런 일이 처음인 듯 보였다.
“말해주십시오, 아가씨.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알리스테어 입니다,” 그녀의 어조가 겸손했다.
“알리스테어,” 그녀의 어조에 압도당한 듯,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가 들어본 이름 중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저는 왜 주군께서 저를 궁금해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는 귀족이십니다. 허나 저는 하녀일 뿐입니다.”
“내 하녀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여관 주인이 앞으로 나서며 심술궂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쟤는 저에게 고용됐습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요. 7년 동안 하녀로 일하기로 약속했지요. 그 대가로 저는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하고요. 이제 삼 년 지났습니다. 그러니 보시다시피 시간 낭비 하시는 겁니다. 쟤는 제 소유물입니다. 제 하녀에요. 주군께서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제거니까요. 아시겠습니까?”
에레크 명장은 그 동안 그 누구에게도 품지 않았던 경멸감을 여관 주인에게 품었다. 한편으로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여관 주인의 심장을 찔러 이 자리에서 그를 없애고 그와 그녀의 계약관계를 종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든 상관없이, 에레크 명장은 왕의 법규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어찌됐든, 에레크 명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왕권을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법은 법이지,” 에레크 명장이 단호하게 여관 주인에게 대답했다. “법을 어길 생각을 없네. 다만, 내일 마상경기가 열리네. 여느 사내들과 같이 그곳에서 우승하면 난 내 신부를 고를 수 있지. 그리고 난 알리스테어 아가씨를 선택하겠다고 미리 말해두겠네.”
술집 안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건,” 에레크 명장이 말을 이었다. “ 만약 이 아가씨가 허락을 해 준다면 말일세.”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바라봤다.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의 시선에 수줍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 에레크 명장이 물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이었다.
“주군,” 알리스테어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주군께선 제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곳에 왜 왔는지 알지 못하십니다. 송구스럽지만 전 이 모든 것들을 주군께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바라보았다.
“왜 말해줄 수 없는 것이오?”
“이곳에 온 이후로 그 누구와도 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맹세를 했지요.”
“그렇지만 왜요?” 에레크 명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알리스테어를 재촉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는 말 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사실입니다,” 나이 많은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이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한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는 왜 이곳에 왔는지 도요. 대답을 안 해요. 지난 몇 년간 계속 물어봤었는데도요.”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이야기에 크게 당황했다. 결국 알리스테어에 대한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만일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면,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말했다. “아가씨의 맹세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가씨에 대한 제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아가씨, 당신이 누구이든 제가 내일 개최되는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우승의 대가로 아가씨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왕국 전체에서 그 누구도 아닌 아가씨를요. 다시 한번 여쭈겠습니다. 허락 해주시겠습니까?”
에레크 명장은 시선을 떨구고 있는 알리스테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그녀는 뒤돌아 주방을 향해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급하게 나간 뒤 등뒤로 문을 닫아버렸다.
에레크 명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봤지요, 시간만 낭비했군요, 쟤는 제겁니다.” 여관 주인이 입을 열었다. “쟤는 싫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가세요.”
에레크 명장을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싫다고 말한 적이 없네.” 브랜디트가 끼어들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거요,” 에레크 명장이 알리스테어를 변호했다. “누가 뭐라 해도 심사 숙고해야 할 일이니까. 그녀는 또한 날 잘 알지도 못하지 않소.”
에레크 명장은 그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밤 이곳에서 머물겠네,” 에레크 명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자네는 내게 방 하나를 내주시게, 그녀의 방 가까이로. 내일 아침 경기 시작 전에 그녀에게 다시 한번 허락을 구해볼 것이네. 그녀가 허락하고 내가 우승한다면, 나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거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네가 그녀와의 노예계약을 파기하도록 자네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겠네.”
여관 주인은 한눈에 봐도 에레크 명장이 하룻밤을 그의 여관에서 보낸다는 사실에 불만이었지만 감히 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빠르게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등뒤로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정말 이 곳에 머무를 생각인가?” 공작이 물었다. “우리와 함께 궁전으로 돌아가게나.”
에레크 명장은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 생에 이보다 더 확신을 가진 일은 없습니다.”
제8장
토르는 허공을 갈라 얼굴을 수면으로 향하고 휘몰아치는 불의 바다 속으로 다이빙했다. 바닷물 속으로 깊이 잠수한 토르는 이내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고 뜨거운 바닷물의 감촉을 온 몸으로 느꼈다.
토르는 잠시 바닷물 속을 들여다봤고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알 수 없는 온갓 종류의 크고 작은 괴상한 생김새의 바다 괴물이 시야 속에 들어왔다. 바다 생물로 가득한 바다였다. 보트로 안전하게 이동할 때까지 바다 괴물의 공격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토르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 숨을 들이쉬며 물에 빠진 부대원을 찾았다. 때마침 물에 빠진 부대원이 허우적거리다 기력을 잃고 물 속으로 가라앉는 찰라 토르는 부대원을 발견했다. 몇 초만 늦었더라도 그는 그대로 익사했을 게 분명했다.
토르는 부대원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은 뒤, 두 사람 모두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숨을 쉴 수 있도록 한쪽 팔로 뒤에서 그의 쇄골을 감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 주변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크론이 보였다. 크론이 토르를 쫓아 바다 속으로 따라 들어온 게 분명했다. 작은 표범은 토르 옆에서 칭얼거리며 열심히 헤엄을 쳤다. 토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쫓아온 크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손에는 부대원을 붙잡고 한 손은 헤엄을 쳐나가야 했기에 크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붉은 소용도리가 치는 물살이 험했고 괴상한 생물체들이 토르 주변에서 수면 위로 몸을 내밀었다 이내 사라졌지만 토르는 주변 환경에 최대한 마음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4개의 다리와 두 개의 대가리를 가진 흉악한 생김새의 보라 빛 바다괴물이 토르 가까이에서 모습을 보이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에 토르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의 시선은 20미터 거리에 있는 보트를 향했다. 한 손에는 부대원을 이끈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헤엄쳤다. 부대원은 온 몸을 마구 뒤틀며 소리를 질러댔고 이에 토르는 두 사람 모두 그대로 물 속에 잠겨버릴 지도 몰라 불안했다.
“가만히 좀 있어!” 토르는 부대원이 잠잠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거칠게 소리질렀다.
마침내 부대원이 잠잠해지자 토르는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바로 옆에서 커다란 물살이 일어나는 소리에 토르는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개의 촉수를 지닌 작은 노란색 생명체였다. 대가리가 사각형인 모습이 눈에 뛰었다. 바다 괴물은 토르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돌진했다. 대가리가 각지지만 않았다면 바다에 사는 방울뱀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모습이 흡사했다. 근접하는 바다 괴물을 보며 토르는 몸을 감쌌다. 그러나 바다 괴물이 자신을 물 거란 예상과 달리 바다 괴물은 아가리를 크게 열어 토르에게 바닷물을 쏟아냈다. 토르는 물살에 감겼던 눈을 뜨며 시야를 확보했다.
바다 괴물은 그렇게 토르 주변을 에워싸고 이리저리 헤엄쳤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토르는 더욱 사력을 다해 헤엄쳐나갔다.
진전이 보였다. 토르는 보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때마침 또 다른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얇고 긴 주황빛을 띠는 형상에 아가리에는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가 나 있었고 12개의 작은 다리가 뻗어있는 생명체로, 뒤로는 기다란 꼬리를 사방으로 휘감고 있었다. 마치 정면으로 서있는 바다가재 모습을 닮아 있었다. 바다 괴물은 물 곤충처럼 물가를 따라 토르 가까이 다가와 몸을 돌리며 꼬리를 휘저었다. 꼬리가 토르의 한쪽 팔을 스치며 토르의 팔을 휘갈겼고 그와 동시에 꼬리에 붙은 촉수가 토르의 팔을 그대로 파고들어 토르는 커다란 고통을 토로했다.
바다 괴물은 계속해서 앞뒤로 이동하며 쉬지 않고 토르를 찔러댔다. 토르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공격하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있는 손은 한 손뿐이었고 할 수 있는 건 그 손으로 헤엄을 치는 것뿐이었다.
토르 옆에서 헤엄치던 크론이 바다 괴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크론이 털을 바짝 세우고 용감하게 바다 괴물을 향해 달려들자 위협을 느낀 바다괴물은 물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토르는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다 괴물은 크론을 피해 반대편에서 토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론은 바다 괴물을 향해 방향을 바꿔 헤엄쳤고 이를 잔뜩 드러내고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토르는 죽기살기로 헤엄쳤다. 바다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났고 토르는 보트에 도착했다. 파도에 맞서 보트는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트 위에는 나이가 많은 부대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기존에 토르 또는 토르 일행과 일면이 없던 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토르를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두 부대원은 자신들의 재량에 따라 몸을 앞으로 내밀어 토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토르는 물에 빠졌던 부대원을 먼저 구출했다. 보트 위의 부대원들은 물에 빠졌던 부대원의 팔을 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내 토르는 크론에게 팔을 뻗어 크론의 배를 들어 물 밖 보트 위로 크론을 던져 올렸다. 크론은 네 발로 나무로 만든 보트의 표면을 긁어 마찰 소리를 내며 미끄러짐을 막았다. 크론의 털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크론은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젖어있는 나무 보트 위에서 잠시 미끄러지는 듯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크론은 곧장 보트 가장자리로 달려가 토르를 찾았다. 크론은 바다를 바라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토르는 나이 많은 부대원 한 명의 손을 잡았다. 부대원이 토르를 끌어 올리던 찰라, 토르는 한쪽 발목과 허벅지에 단단한 근육이 감기는 느낌을 받았다. 뒤돌아 아래를 살핀 토르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연노란 푸른 빛의 오징어 형태를 한 바다 괴물이 토르의 다리를 촉수로 단단히 감고 있었다.
살 속으로 촉수가 파고드는 순간 토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질렀다.
신속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토르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몸을 구부려 촉수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단단하고 두꺼운 촉수를 단검으로 찌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토르의 행동에 바다괴물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수면 위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빛 형상에 눈이 없었고 기다란 목 위로 커다란 두 개의 하관을 벌려 토르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토르는 다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무슨 수를 강구해야 했다. 나이 많은 두 명의 부대원들이 사력을 다해 토르를 끌어올렸지만, 토르는 점점 미끄러져 토르의 몸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론은 쉼 없이 소리를 질렀고 털을 바짝 세운 채 금방이라도 바다 속으로 뛰어들 기세로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설사 크론이 뛰어들어 공격한다 하더라도 바다 괴물에게는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나이 많은 부대원 한 명이 앞으로 몸을 빼고 크게 외쳤다”
“몸을 피해!”
이에 토르는 몸을 숙였고, 나이 많은 부대원들을 물 속의 바다 괴물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빠르게 날아갔지만 목표물을 놓쳤다. 부대원들이 던진 화살은 바다 괴물에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물 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바다 괴물을 창으로 공격하기엔 바다 괴물의 움직임이 굉장히 날렵했고 또 형체가 너무 가늘었다.
순간 크론이 보트에서 뛰어올라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크론은 바다 괴물 위에 안착해 날카로운 이빨로 바다 괴물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크론은 바다 괴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다 괴물의 목덜미에 이빨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나 모든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 바다 괴물의 피부는 상상도 못할 만큼 질기고 단단했다. 바다 괴물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크론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는 동시에 토르의 허벅지를 계속해서 단단히 조였다. 벗어날 수 없는 덫에 다리가 끼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숨을 쉬기가 고통스러웠다. 다리를 감싼 촉수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고 이내 다리가 잘려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토르는 자신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나이 많은 부대원을 손을 놓고 허리에 찼던 작은 단검을 빼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르는 단검을 빼내자 마자 손에서 놓쳐버렸다. 순간 채 놀라기도 전에 이미 토르의 얼굴은 바닷물 속에 잠겨버렸다.
토르는 보트에서 멀어져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바다 괴물이 토르를 보트 반대편으로 빠르게 끌고 들어갔다. 토르는 속절없이 보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눈앞에는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보트의 형상만이 아른거렸다. 이후 토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바다 속 깊숙이 끌려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토르는 불의 바다 깊숙한 곳으로 끝도 없이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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